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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27 15:25 수정 : 2013.06.2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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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그 완성의 과도함으로 인해 다른 세상이 되었다.” 2007년에 남긴 마지막 저서 <사라짐에 대하여>에서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과도함’이 근대문명을 낳았지만 완성된 문명은 오히려 과도함으로 인해 소멸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급진적 성찰이 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

위기와 재난이 항시적으로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지금, 과도함을 성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대중문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계몽과 쾌락을 결합시키는 소위 ‘착한’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인간의 조건>(KBS)은 대표적이다. 이 프로그램은 여섯명의 개그맨이 일주일간 한집에 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아 웃음을 주는 예능이면서, 동시에 현대사회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새김질해 보자는 강한 계몽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휴대폰·인터넷·텔레비전 없이 일주일 살기’라든가 ‘쓰레기 없이 일주일 살기’ 등의 기획을 통해 이 프로그램은 우리 시대 ‘인간의 조건’을 다시 쓰려 한다. ‘~ 없이 살기’라는 주제에는 ‘과도함’이라는 문명적 경향을 정면으로 거스르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예컨대 ‘쓰레기 없이 살기’ 편은 가정이나 식당 등에서 배출되는 생활 쓰레기의 규모가 자원의 낭비이고 환경의 적임을 친절히 설명하면서, 개그맨들 각자가 일상에서 힘들게 쓰레기를 줄여가는 과정을 가벼우면서도 묵직하게 담아낸다. 소비의 과도함을 꾸짖는 이 포맷은 우리에게 가벼운 죄책감을 안긴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소비’의 다른 측면을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 소비는 개별 소비자의 소비행위로 한정되지만, 환경의 측면에서 소비는 개발과 생산을 하는 경제행위 전체이다(환경과 자원의 소비). 환경의 관점에서는 역설적으로 생산자(대개 자본)가 곧 소비자인 셈이다. 생태학자들은 지구 환경의 위협 요인은 개별 소비자의 소비가 아닌 자본의 소비(개발, 생산)라고 말한다. 우리가 소비를 아무리 줄여도, 자본의 상품 생산이 계속 작동하는 한 환경파괴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쓰레기도 마찬가지다. 쓰레기에는 가정이나 식당 등 개인들이 버리는 생활 쓰레기가 있고, 경제행위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산업폐기물)가 있다. 이 둘의 규모 차이는 놀랍다. 미국의 경우, 가정에서 배출되는 쓰레기 비율이 전체의 2.5%에 그치는 데 반해, 개인과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산업쓰레기 비율이 나머지 97.5%를 차지한다. 한국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쓰레기로 인한 환경오염과 사회적 비용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일은 곤란하다는 점이다. 환경의 소비와 쓰레기 배출의 압도적 주체는 개인이 아닌 자본이기 때문이다. 상품 생산과 판매를 한시도 중단할 수 없는 자본의 속성이야말로 환경파괴와 재난을 가져오는 원인이다. 자본의 메커니즘을 혁신적으로 개혁하거나 폐기하는 노력 대신 개인의 습관을 계몽하는 데 치중하는 일은 문제해결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거대한 체제의 환부는 그대로 두고 개인의 행위와 도덕성을 파고드는 행태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 접근방식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힐링과 멘토와 자기계발의 논리 역시 동일하다. 수십년 지속된 뒤틀린 체제가 낳은 문제들을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접근으로 어루만지는 접근방식은, 그 착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문제를 감추는 역할을 훨씬 더 잘 수행한다. 쓰레기 배출 제로를 달성한 연예인이 뿌듯해하고, ‘드림워커’의 인생살이를 듣는 대학생들이 눈물을 흘릴 때, 바로 그 감동의 순간이야말로 사회의 모순이 나의 모순이 되는 순간이다. 나를 바꾸라 조언하는 ‘착한’ 대중문화는 그렇게, 사회를 지움으로써 사회를 구원하려 한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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